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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담론] 자본 헤게모니와 기독교 영성의 차이
Journalist : changjo | Date : 16/03/17 19:51 | view : 125678
 

*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누가복음 16:19~31)

이 이야기에서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TV에서 영재발굴단이 방영되었습니다.
속초여고 학생이 성악공부를 하고 싶은데,
가정형편 때문에 레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레슨비로 아파트 두 채 값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은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데에도
이렇게 돈의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그 TV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미디어는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돈이 있으면 가능하고,
돈이 없어서 불가능한 상황을 대비시키는 장면이 많습니다.
그냥 돈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독 미디어에서는 이런 상황을 부각시킵니다.

훌륭한 사람도 일단 돈이 많아야 합니다.
그 돈으로 남도 돕고 좋은 일도 합니다.
돈이 없으면 못하는 그런 일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돈이 많은대도 그렇게 남을 돕는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하는 방식 말입니다.
조금 순서를 바꾸면,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은행에서는 신용이 좋은 사람들에게 저리로 돈을 빌려줍니다.
그런데 신용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더 높은 이자를 물립니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의 위험부담을 말하는데,
이건 순 억지요,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신용이 낮은 사람에게 더 높은 이자를 물리면,
그 사람의 형편이 더 좋아질까요?
아니면, 더 나빠질까요?
은행은 다 압니다. 당연히 더 나빠지지요.
그러면, 더 높은 이자를 물립니다. 더, 더, 더,..

이것은 은행의 예를 든 것입니다.
돈을 벌어본 사람은 압니다.
가치를 생각해서는, 사람을 생각해서는 돈을 벌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직종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부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보다 돈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회가 굴러가다보면,
점 점 더 돈을 벌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돈을 벌기 가장 좋은 방법은 기회의 산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으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경쟁이니, 마케팅이니 이런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러니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하고, 남을 돕는다는 발상은
악한(의도하든 안하든) 과정을 덥고, 선으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을 벌 때, 사회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최소화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병주고 약주는 사회는, 미디어는 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의 논리'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모두 청산하고 좇으라 하셨으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다고 하셨고,
본문에서는 부자를 '거지' 나사로와 비교하셨습니다.
본문에는 부자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넓게 보면, 조금만 깊게 보면
일상의 일로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기본 맥락을 언급했지만,
졸저에서 중심 주제로 다룬 것이 '제도권'으로 상징되는
'자본과 패권 헤게모니'의 문제점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면,
아깝지 않은 내용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대안은 담론입니다.
'자본 헤게모니', '사회적 문제점' 등에 대한 비판으로는 부족합니다.
담론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관계담론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복음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관계담론을 배우고, 실천하여 형성할 수 있는 묘안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이란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이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인간으로부터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마치, 아랫글의 이상한 자전거를 타는 영상에서처럼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이나 윤리와는 현격하게 구분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며,
배우고 익힌 모습으로(새로운 자전거를 배운 모습처럼)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사회는 이렇게 구조화 되는 것입니다.
몇 몇 훌륭한 사람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회구조를 외면한 채,
이 사회에서 좋은 일이나 사례를 남겼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과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논리를 '부자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옷을 벗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함께'라는 것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불특정 다수라 해도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만 끼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까 위에서 말한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면, 개인적으로는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려면,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흐름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나무랐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든 사회구조와 흐름을
 간파하시고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얇퍅한 선에 놀아나서는 안됩니다.
그 얇은 판막 뒤에 숨겨진 썩고 더러운 악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이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좋은 일은, 남을 돕는 일은 내 존재 중심으로부터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적 라이프스타일이 간헐적 봉사보다 더 중요합니다.
일상이 사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멋들어진 봉사보다 더 중요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몇 푼의 돈이나 물품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새롭게 디자인 하는 것은 타자에게 '환경'을 제공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펼칠 수 있는 '생태계'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망대를 세울진대,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시작하면, 가벼운 들 것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겁게 시작하면, 환경과 생태계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아들 덕에 장수풍뎅이 애벌레를 키워서
열 댓 마리의 우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생태계)을 허락했을 뿐입니다.
돕는 것과 환경(생태계)을 허락하는 것과의 차이는
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차원이 다릅니다.
부자 논리는 '도움의 담론'을 펼치길 좋아합니다.
그들은 '도움의 대상자'들에게 도움만 주지 그들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사랑은 왼손도 오른손도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대상도 없고, 타겟도 없고, 누가 누구인지 그 경계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방식을 경험하고 배워나가길 더욱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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