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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지식정보사회에서 영성의 의미
Journalist : changjo | Date : 15/06/13 1:37 | view : 135565
 

포스트 모더니즘은 새로운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리얼리즘은 왜 없을까?
포스트 리얼리즘 같은,..
그러나 포스트 리얼리즘은 없다.
리얼리즘은 그냥 리얼리즘이다.

한편, 모더니즘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연속이다.
다시 말해서, 철저한 이성주의다.
이성의 열매는 지성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은 지성적 작업의 결정체다.

지성적 작업의 단점은
지성적 작업을 하는 사람끼리도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니 대중적이지 못할 수 밖에,..

그래서 등장한 것이
대중적 틀을 입은 지성적 작업이다.
역시 그 내면의 구조는 지성적이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옷만 편하게 입은 것이다.
양복이 케쥬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지식정보사회는
지식화의 과정과 정보화의 과정으로 이룩된다.

지식화는 유럽중심의 선진산업사회의 경우
역사 그 자체가 지식화의 역사이다.
반면에 아시아를 비롯한 그 이외의 경우
별도의 지삭화라는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를 앞당길 수는 있어도
(대한민국이 대표적인 나라이다)
지식화 과정에는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지식화는 안하면 안되나?
답은 안된다.
그 지식화가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원래 지식화라는 개념은 좋은 것이다.
어떤 가치를 체계화 하고, 구체화 해서
어떤 주어진 상황에 활성화된 상태가 되도록 해서
필요시 쓸모가 있도록 하는 작업이 지식화이다.

예컨데 아버지, 어머니를 지식화 한다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였던 아버지만 아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어머니였던 어머니만 아는 것을 넘어서,
아버지의 어린시절, 어머니의 사춘기 때,
그리고 청년 시절의 경험 등을 알게 됨으로써,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녀들로서 공감대의 폭이 넓어지고
관계가 보다 자연스러워지고 깊어질 수 있게 된다.

지식화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막연한 아날로그식 가치를
보다 면밀히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자르고,
그 단면을 들여다 봄으로써
디지털식 가치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화란 디지털 사고방식의 적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지식화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식화만 있게 될 때 발생한다.
지식화가 디지털 사고방식의 결과라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이 특성이 타락한 사람에 죄성에 의해서
부패되고 왜곡되고 만다.
한 지식은 어떤 관점을 전제할 때에는 성립한다.
그러나 그 전제된 관점을 벗어나게 되면
그 지식은 도전을 받거나 거짓이 되곤 한다.
여기 까지는 잘 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떤 사람이 A 지식을 통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A 지식이
다른 지식들보다 우세하길 바랄 것이다.
그러면 B, C, D 등의 다른 지식의 전제를
무너뜨리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기까지 와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화라는 것이 그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열린사회 같고,
자유 경쟁의 사회 같아 보이지만,
어떤 지식이 우월해지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플랫폼 경쟁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이 플랫폼은 상당부분 지식화를 먼저 이룬
유럽 중심의 나라들이 이미 대부분을 선점하고 있다.
(플랫폼은 우리 말로 하면 터나 멍석 정도의 용어)

그래서 우월한 지식이라는 것이 있게 된다.
원래 우월한 지식이란 없는 것이 맞다.
관점에 따라서 지식이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절대 지식을 추구한 입장이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절대 지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 지식은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말로만 포스트 모던의 시대이고
사실 정치적, 상업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진정한 포스트 모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 모던은 정치적 용어가 되었고
헤게모니를 쥔 상위계층에서는 도구적으로 활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답은 '있다' 이다.

지식화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은 이미 헤게모니를 쥔 상위계층에 넘어갔다.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서 지식 헤게모니는 철옹성이 되었다.

옛날의 노예들이 권력이라는 울타리에서
노동의 노예가 되었다면,
현대사회의 노예들은 세계화라는 울타리에서
지식의 노예가 된 모양이다.
상위계층이 만든 메이저리그에 오르기 위해
그 위계적 지식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해법의 시작은
그 위계적 지식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여러 관점으로 비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삶과 생활의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언어가 리얼리즘의 언어이다.
그리고 아날로그의 사고방식이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것이 바로 삶과 생활의 언어이다.

앞서 언급한 지식과 디지털적 사고방식은
유용하고 효과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 뿐이다.
거기엔 오리지널리티가 없다.
절대성도 없다.
그러니 우왕좌왕 거릴 수 밖에

삶과 생활의 언어란 무엇일까?

간단하다.
그리고 쉽다.

숨을 쉬어야 한다.
숨을 쉬면 살고, 숨을 안 쉬면 죽는다.

결혼?
그것을 지식화 하니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도 하겠다고 설레발이다.
지식이 지식을 망치는 꼴이다.

결혼은 지식이 아니다.
삶의 언어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섹스하고 애 낳고,
애쓰며 자식농사 짓는 삶이며 생활이다.

교만의 극치가
지식으로 지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교만은 지식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언어이고 생활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교만은 교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슬픔이 슬픔인 것처럼,
웃음이 웃음인 것처럼,

웃음을 누가 참으랴!
웃었으면 웃은 것이다.
이것이 삶이고 영성이다.

배고프면 배가 고픈 것이다.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자동차 왕 포드가
'나는 부품을 조립하는 손을 필요로 했을 뿐인데,
 왜 자꾸 '사람'이 나오냐?' 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노사협의 요청을 의아해 했다.

포드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어떤 관점에서
규정하고 지식화 했던간에
노동자들은 손으로 일하고 입으로 먹는 사람이다.
이 단순한 삶의 이야기를 외면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며,
영적으로 악한 것이다.

리얼리즘은 삶의 언어를 담아내는 이야기 구조이다.
지식이라는 산을 넘어 '이야기'가 진리를 담아내는 것이다.

지식은 상대적이요.
이야기는 삶을 담아내고 진리를 담는다.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화나는
바로 이 삶의 언어를 회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 시작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고,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다.

이것을 자각함이 깨어 있음 아니겠는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죽고
많은 지식도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는 그 사실의 삶이 더 우세하고,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였다면 그 사랑은 영원하리니,
영원한 것은 죽음보다 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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